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폴트 2세 (문단 편집) == 생애 ==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3남으로 태어났지만 차남이 일찍 죽은 덕에 사실상의 차남으로 대우받았다. 1764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했고,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 차남 레오폴트 2세 결혼식 축하하러 갔다가 [[인스브루크]] 궁전에서 뇌졸중으로 사망]가 죽고 형 [[요제프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자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대리인만 보내고 한동안 방치된 토스카나 대공국을 발전시켰다. 하수도 정비 등의 공공사업을 수행했고 세제를 개선했으며 군대 양성 및 산업 부흥,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하였다. [[1784년]]에는 [[피렌체]]에 [[우피치 미술관]]에 견줄만한 새 [[아카데미아 미술관(피렌체)|미술관]]을 지었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이 곳에 위치해 있다. 레오폴트는 [[메디치 가문]]이 남긴 구습을 철저하게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외적인 발전과는 별개로 주민들로부터는 외지인이라며 인기가 없었고 교회 개혁 과정에서 [[교황]] 세력과 충돌하기도 했다. 교회의 재산을 세속으로 가져오는 데 실패했으며 성직자들에 대한 법령 통제 역시 실패. [[가톨릭]] 세력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1786년 11월 사형제도를 폐지하기도 했다. 레오폴트 2세는 토스카나를 통치하기 위해서 비밀경찰을 창설해 활용했다. 형 [[요제프 2세]]가 아들을 낳지 못했고 자식들이 모두 요절했기에 그는 사실상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요제프 2세가 레오폴트에게 섭정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거절했다. 1790년, [[요제프 2세|형]]이 사망하자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로 선출되었으며 토스카나 대공국은 차남에게 물려주고 [[빈(오스트리아)|빈]]으로 떠났으며 황제에 즉위한다. 황제가 된 그는 우선적으로 요제프 2세의 실정들을 만회했다. 형이 벌여놓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1790년 9월에 8개월 기간의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1791년에 시스토바 조약을 체결하여, 종식시켰고 [[프랑스 혁명]]을 이유로 [[프랑스 제1공화국|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했으며 [[벨기에인|남네덜란드인]]의 특권을 인정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네덜란드 지역]]을 진정시키고 각 지역의 의회 세력 또한 파트너로서 인정했다. 대내적으로는 온건책을 쓰며 혁명의 기운을 억제하는 데 주력했고, [[동맹의 역전]] 이래 적대관계였던 [[영국]]과 다시 동맹관계를 맺고 프랑스의 상황 변화에 주목했다. 중간에 [[러시아 제국]] 황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침공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레오폴트 2세는 거부했다. 제3차 [[폴란드 분할]]로 남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를 합병하고 오스만 제국과 싸우려는 예카테리나 2세의 생각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박하고 성실한 성품을 가졌고 대체로 형인 요제프 2세보다 나은 인재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레오폴트 2세는 재위 2년 만인 44세의 나이로 갑자기 타계하였다. 독살설이나 암살설이 돌았지만 입증된 건 없다. 재위는 장남 [[프란츠 2세]]가 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